되돌리기

분류없음 | 2008/10/27 15:55 | 박예진

#1.

이미 쏟은 물은 주워담을 수 없는 것처럼 이미 일어난 일은 없었던 걸로 돌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심지어
쏟아진 물은 햇빛에 오래 말리면 흔적이라도 사라지기라도 하지, 이건 마치 옷에 기름을 들이붓기라도 한 것
처럼 드라이를 맡기지 않으면 말라도 흔적이 남아 흔적 속에 머무르는 기억이 언제까지고 상기될 수밖에 없어
현재를 살아가는 데에 버거운 짐이 되기도 한다.

쉽게 내뱉는 말들 중에 하나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혹은 '처음부터 몰랐던 것처럼' 혹은 '지금 이곳에
없는 것처럼'인데 내 입으로 참 쉽게 나오면서도 절대로 쉬운 말처럼 되지 않아서 안타까울 때가 참 많이 있
다. 알아버린 것을 기억 장애가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알기 이전으로 돌릴 수가 있으며, 알고 있는 것을 어떻
게 모르는 척, 아닌 척 할 수 있겠는가마는, 알고 있는 것을 모르는 척하려는 모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어
쭙잖게 당하는 것은 '감정'이란 녀석일 뿐이다. 이 녀석이 괴로워지면, 이번엔 아는 것을 모르는 척하는 것에
더해서 괴롭지만 괴롭지 않은 척까지 해야해서, 머리도, 가슴도 같이 괴로워지고, 던져진 작은 티끌 하나에도
쉽게 와르르 무너지고야 만다.

#2.

난 그녀에게 쉽게 말했지만, 쉽지 않다는 것을 매순간 스스로도 깨닫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사실 스스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으면서, 스스로가 놀랄만큼 처절하게 무너졌으면서, 너무도 쉽게 그 따위 모노드라마에는
출연하지 말라고, 스스로 그만두기를 강요했다.

#3.

그녀의 생활에서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일어나서 출근을 하고, 회진을 돌고, 콜을 받고, 푸시를 하고,
신환은 받고...없는 것과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강요해서 정말로, 정말
로 너무 미안해지는 게 이상한 오늘. 하지만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는 판단을 변함없이 내리는 오늘.

2008/10/27 15:55 2008/10/27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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